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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마니아

레트로 마니아

김쿠만 지음
무선 120*190 | 318쪽 | 16,800원
분류 한국소설
가격 16,800원
ISBN 979-11-89680-36-7 (03810)
초판 1쇄 발행 2022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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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도서

책 소개

2022년 쿨투라 신인상, 한국과학문학상으로 새롭게 이름을 알린 작가 김쿠만의 첫 번째 소설집 『레트로 마니아』를 펴낸다. 김쿠만은 “문학은 사회의 바깥과 안에 겹쳐 있는 미세한 ‘사이’의 언어들을 다루어야 한다. 김쿠만의 서사는 그 ‘사이’의 맛과 질감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의 농담에서는 동시대의 어떤 작가들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감칠맛이 느껴진다.”(쿨투라 신인상 심사평 중),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가”(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심사평 중)라는 평가를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했지만 김쿠만이 하루아침에 운이 좋아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많은 젊은 작가들이 하는 것처럼 무대 뒤에서 많은 문을 두드렸고, 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대안을 모색했으며,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실력과 세계관을 단단하게 다져왔다. 김쿠만이 다다른 지점은 그리운 옛날이다. 이 책 『레트로 마니아』에는 그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출판사 리뷰

지나오지 않은 과거를 그리는 일
2022년 쿨투라 신인상, 한국과학문학상으로 새롭게 이름을 알린 작가 김쿠만의 첫 번째 소설집 『레트로 마니아』를 펴낸다. 김쿠만은 “문학은 사회의 바깥과 안에 겹쳐 있는 미세한 ‘사이’의 언어들을 다루어야 한다. 김쿠만의 서사는 그 ‘사이’의 맛과 질감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의 농담에서는 동시대의 어떤 작가들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감칠맛이 느껴진다.”(쿨투라 신인상 심사평 중),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가”(한국과학문학상 심사평 중)라는 평가를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했지만 김쿠만이 하루아침에 운이 좋아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많은 젊은 작가들이 하는 것처럼 무대 뒤에서 많은 문을 두드렸고, 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대안을 모색했으며,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실력과 세계관을 단단하게 다져왔다.
『레트로 마니아』에서 김쿠만이 다다른 지점은 그리운 시절이다. 그리움의 지점은 90년대일 수도, 아니면 60년대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22세기 이후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1990년대생 김쿠만이 말하는 ‘그리운 시절’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보이는 시절이다. 로망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나’ 혹은 『레트로 마니아』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지나오지 않았던 과거의 어느 시점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그 시절의 모습을 만져보는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래서 「해설」에서 금정연은 ‘포스트-로망 시대’를 지시하는 것이다.
“미래는 어둡고 현재는 희박하다. 있는 것은 과거, 지나치게 많은 과거다. 그것이 오늘 김쿠만의 인물들이 혹은—이렇게 말해도 좋다면—세계가 처한 곤경이다.…레트로 마니아들에게 과거가 사라진 미래의 대용품으로, 욕망을 투영할 대상으로 재발견된 것이라면, 미래 없음이 디폴트로 장착된 이들에게 과거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 따름이다. 오래된 나무처럼. 또는 바위처럼.…그들은 과거와 소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를 보고, 다시 과거를 바라보는 레트로 마니아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거리를 둔 애정을 담은 시선으로.” (금정연, 「해설」 중에서)
『레트로 마니아』에는 2021년 문예지 [에픽]에 발표한 표제작 「레트로 마니아」, 쿨투라 신인상을 받은 「장우산이 드리운 주일」을 비롯한 온오프라인 문예지에 발표한 여덟 편의 소설, 그리고 서평가 금정연의 밀도 있는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레트로 마니아』는 로망이 있었던 과거를 지켜보며 그 시절을 함께 그리워할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차례

레트로 마니아 7 라틴화첩기행 40 천박하고 문제적인 쇼와 프로레스 80 Roman de La Pistoche 124 도무지, 대머리독수리와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162 제임슨의 두 번째 주인 196 안주의 맛 227 장우산이 드리운 주일 260 해설 포스트-로망 시대의 소설 293 작가의 말 312 작품 수록 지면 317

지은이

김쿠만
1991년 출생. 종합소설가. 영화 감독 두 사람의 이름을 멋대로 약탈해서 필명을 만들었다. 2020년 웹진 [던전]에 입장했으며, 2021년 문예지 [에픽]에 등장했다.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으로 2022년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 「장우산이 드리운 주일」로 제16회 쿨투라 신인상(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추천의 글

포스트-로망 시대의 소설

금정연(작가)
“무슨 얘기부터 할까요? 우리들의 현재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휴일』(이만희, 1968)

1

미래는 어둡고 현재는 희박하다. 있는 것은 과거, 지나치게 많은 과거다. 그것이 오늘 김쿠만의 인물들이 혹은–이렇게 말해도 좋다면–세계가 처한 곤경이다. 그렇다고 당장 큰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들은 큰일 없는 세계에서 오래 전에 망한 레트로 게임에 몰두하고(「레트로 마니아」), 쓸데없이 비싼 빈티지 빠를 들락거리며(「제임슨의 두 번째 주인」), 이혼한 아내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답하고(「도무지, 대머리독수리와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교양다큐를 찍거나 여행 기사를 쓰기 위해 ‘퇴물 예술가들이 보름달이 떠오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살하는 카리브해의 섬나라’와 ‘선진국에서 멸망 당한 로망이 아직 남아 있는 동남아’를 찾고(「라틴화첩기행」, 「Roman de La Pistoche」), “쇼와 시대 때 태어난 늙은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보지 않을 소설들을 번역하면서(「천박하고 문제적인 쇼와 프로세스」), 새까만 장우산을 쓴 채 오지 않는 비와 종말을 기다린다(「장우산이 드리운 주일」). 허공으로 사라지는 담배의 연기, 술, 햄버거, 그리고 열없는 대화와 함께. 그들은 모두 과거의 중력에 묶인 사람들,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들, 어딘가 조금 어긋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루저, 힙스터, 찌질이, 문청…뭐라고 불러도 좋다. 그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지만, 이들을 ‘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 경우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세계이기 때문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 거의 전지구적 단위로 고여 있는 시간이. 사이먼 레이놀즈는 “2000년대가 진행할수록 앞으로 나가는 감각은 점점 엷어졌다. 시간 자체가 느리게 흐르는 느낌은, 강물이 조금씩 굽이치다가 결국 한곳에 고여 호수를 이루는 광경을 연상시켰다”는 말로 『레트로 마니아』를 시작한다. 비유를 이어가보자. 시간이 강물이라면 우리의 존재는 그 위에서 수상 스키를 타는 레포츠 마니아나 그 속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수생동물보다는 그것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떠밀려가는 부유물에 더 가까울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혹은 자신의 의지라고 착각하며 시간이 우리를 데려다주는 곳에 어김없이 도착하는 존재. 오해하면 안 된다. 이건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죽음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생물학적인 시간과 문화적인 시간. 레이놀즈는 물론 후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강물 위를 끝없이 /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 어느 고요한 호수가에 닿으면 /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라는 오래된 노랫말처럼, 그곳에서 우리는 취향과 스타일에 따라 세심하게 분류되(는 동시에 끊임없이 재분류되)어 작은 접시에 올려지는 과거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며 각자에게 주어진 생물학적인 시간을 살아간다. 시게루의 레트로 게임 카페에서. 제임슨의 빈티지 빠에서. 커다랗고 작은 또 다른 웅덩이들에서. 그러니까 세계에서. 과거가 “탈시간적 뷔페처럼 펼쳐지면서” 이제 루저(시간의 흐름에서 본의 아니게 벗어난)와 힙스터(시간의 흐름을 자발적으로 벗어난)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늘 그런 건 또 아니겠지만…
루카치가 근대 문학의 주인공을 세계와 불화하는 문제적 개인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일방적인 (문화적)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는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계와 맞서며 세계가 내재한 모순과 균열을 드러내고 현실 속에 은폐된 진짜 현실의 모습을 폭로하는 것. 그리하여 총체성이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예술의 총체성을 통해 삶의 총체성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감각을 느끼)는 것. 이것이 『소설의 이론』을 쓰던 젊은 루카치가 생각한 리얼리즘이었다. 잠깐, 루카치라고? 2022년에? 리얼리?즘?
옛날사람, 꼰대, 아저씨, 문필가… 뭐라고 불러도 좋다.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나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갈 생각이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62년 마치 다른 사람의 저작을 보듯 『소설의 이론』을 돌아보며 루카치는 “그와 같은 이론들의 사회철학적 토대는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호하기는 매한가지인 낭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입장”이라고 지적한다. 분명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낭만(루카치가 말하는 의미와 조금 다름) 혹은 일종의 ‘로망’(루카치가 말하는 의미와 완전 다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타락한 세계와 맞장뜨는 나! 통념과 달리 로망은 과거지향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빛을 뿜고 있는 미래를 향한 전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다만 벤야민의 아우라가 그것이 붕괴된 후에야 추인되듯, 로망 또한 미래에 대한 전망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인식될 뿐이다. 과거형으로. 우리가 지금 루카치의 서술에서 로망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라는 오래된 노랫말처럼…
루카치는 이어서 쓴다. “『소설의 이론』은 보존하는 성격이 아니라 폭파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소박하고 전혀 근거 없는 유토피아주의, 즉 자본주의의 붕괴–이는 생기 없고 삶에 적대적인 경제적·사회적인 범주들의 붕괴와 동일시되었는데–로부터 자연스럽고 인간의 품위에 걸맞은 삶이 생겨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토대로 한 것이다.”
물론 희망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2

–그럼 선생님의 장래 희망은 뭐죠? 제임슨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미규에게 답했다. –내 장래 희망은 1988년에 죽었어. 「제임슨의 두 번째 주인」 중에서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인 동시에 이상은이 「담다디」로 MBC 강변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해다. 그리고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사라진 해이기도 하다. 어린 제임슨은 버스 안내양의 꿈을 꾸었던 걸까? 그럴 수 있다. 비록 제임슨은 “직업 따위가 장래 희망이 될 수 없”다며 화를 내긴 하지만. 제임슨은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생체 실험을 당한 후유증으로 꿈(이것의 내용은 잠시 후에 밝혀질 것이다)을 포기해야 했을 수도 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긴 유언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어쩌면 죽은 건 할머니가 아니라 베스트 프렌드였는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들은 같은 사람(또는 외계인)을 사랑하는 이상한 삼각관계(Bizarre Love Triangle)로 엮여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추측, 2차 창작, 차라리 망상은 끝이 없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사태를 심플하게 바라보기 위해 장래 희망은 죽었다는 제임슨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장차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희망’이라는 관용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가올 앞날에 대한 희망’, 다시 말해 ‘희망으로서의 미래’ 그 자체가 끝장났다는 뜻으로.
“물론 미래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다소 엉뚱하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미래는 계속 펼쳐지고 있으니까.”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말한다. “그러나 ‘미래’라고 말할 때 나는 시간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진보적 근대의 문화적 상황에서 출현한 심리적 인식, 즉 근대 문명의 오랜 기간 동안 만들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 동안 정점에 달한 문화적 기대이다.”
문화적 기대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뜻한다. 현실이 되지 못한 기대는 시간 속에 흩어지지만 그중 일부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처럼–문화적인 기억이 되기도 한다. 순수한 가능성으로 남은 미래에 대한 전망의 기억. 원한다면 그걸 로망이라고 불러도 좋다. 모든 기억은 언제나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제5공화국 시절에나 먹힐 법한 발언”을 입에 달고 사는 편집장은 ‘나’에게 선진국에서 멸망당한 ‘로망’을 보여주는 기사를 쓰라고 닦달하고, 술에 취해 황금기의 일본 프로레슬링을 회상하던 일본 변두리 문예지의 담당자는 ‘나’에게 “문제가 많긴 해도, 쇼와 시대는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5공화국은 1988년 2월 25일 13대 대통령 노태우의 취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쇼와 시대는 1989년 1월 7일 일왕 히로히토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같은 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그 소식은 미국 국무부를 위해 일하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로 하여금 역사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전쟁이나 쿠데타 등의 ‘역사적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므로 역사는 끝났다, 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쓰게 만들었다. 악명 높은 『역사의 종언』의 탄생.
이쯤에서 또 다른 제임슨의 말을 떠올려보자.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마크 피셔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을 경유하며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정의한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 좌파들은 후쿠야마의 주장을 유치한 선동, 떡 없는 김칫국, 경박한 딸랑이라며 비웃었지만 피셔는 “문화적 무의식의 층위에서는 이 테제가 수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고 말한다.
리얼리즘-(출구+미래+희망)=자본주의 리얼리즘{\textsf {리얼리즘-(출구+미래+희망)=자본주의 리얼리즘}}
따라서 1988년은 하나의 분기가 된다. 미래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물론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말하는 ‘픽션적인 대담한 단순화’가 필요한 순간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존재했던 미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있다. 1988년 이전에 태어난 시게루, 제임슨, 안 교수, 『포인트』 편집장과 ㈜한국문학문제연구소 운영국장, 『쇼우세츠이찌방』 담당자가 그런 사람들이다. 레트로 게임에 집착하고, 프로레슬링의 지나간 황금기에 열광하고, 문학 타령을 하고, 잃어버린 낭만을 찾는 방식으로 ‘미래 없음’에 대처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레트로 마니아들이다.
재미있는 건 제임슨의 방식이다. 스스로를 아일랜드계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여전히 가족 로망스에 머물러 있는 중년이다. “프로이트의 정식화에 따르면 가족 로망스는 개인의 심리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특히 소년들 개개인이 사회 질서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떤 위치에 대한 환상을 품는 방식”이자 “사라져간 행복한 시절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제임슨이 처음부터 아동기의 환상에 고착되어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기원에 대한 환상, 공상, 차라리 망상은 롤랑 바르트가 ‘글쓰기-의지(스크립투리레scripturire)’라고 부르는 것을 추동하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는 바, 마르트 로베르는 한 발 더 나아가 가족 로망스가 바로 소설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소년 제임슨의 장래 희망이 작가였다고 주장할 생각이다. 어린 제임슨을 사로잡았던 가족 로망스는 시간과 함께 점차 글쓰기-의지로 승화되었고, 글쓰기-의지는 그를 조금씩 작가의 꿈으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미래가 사라져 버렸다. 나아갈 곳을 잃은 제임슨의 글쓰기-의지는 방향을 돌려 과거를 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원을 둘러싼 픽션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이걸 퇴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는 소설을 쓰는 대신 자기 자신을 픽션 위에 정초했고, 그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없음’에 대응하는 그의 방식이 되었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노트가 들려 있지만 그것은 이제 소설의 재료가 아니라 경영의 도구일 뿐이다.

3

노트는 빠와 함께 ‘나’의 손에 넘겨진다. 그것은 얼핏 대물림, 승계, 전통의 전승을 떠올리게 한다. 묠니르처럼? 그냥 노트처럼.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노트와 함께 빠를 물려받거나(이때 ‘나’는 단골들의 정보가 빼곡히 적힌 제임슨의 노트를 바탕으로 빠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빠와 함께 노트를 물려받거나(이때 ‘나’는 영업 시간이 끝나 텅빈 바의 테이블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어쩌면 소설 같은 것을 끼적일 것이다). 늘 그렇듯 상황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노트에 새로운 정보(‘힙스터 흥선대원군’)를 기입하려는 ‘나’의 시도는 제임슨에 의해 저지당하고, 노트에 적힌 단골들의 신상명세를 달달 외우면서도 ‘나’는 정작 「슈퍼 마리오」의 배경음악을 신청한 “마리오처럼 콧수염을 기른 남자 손님”(시게루)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것을 전통의 단절, 혹은 전통의 붕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래서 내가 아감벤을 인용할 수 있도록.
“…표현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전통의 붕괴’는 어떤 식으로든 과거의 상실 내지 탈가치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붕괴의 순간이 도래할 때에만 과거가 과거로서의 무게를 지니고 전대미문의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전통의 상실은 따라서 과거가 전승 가능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과거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발견되지 않는 한 과거는 이제 축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감벤이 보기에 이것은 나쁜 소식이다. 왜 아니겠는가? 저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기본적으로 사이먼 레이놀즈가, 마크 피셔가, 프랑크 베라르디 ‘비포’가 ‘레트로 마니악’한 오늘날의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과거는 어마어마한 무게로 우리를 짓누르고, 시간은 흐르지 않고, 문화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역량을 상실했고, 남은 것은 끊임없는 반복과 고만고만한 변주, 느린 종말일 뿐이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작 김쿠만의 ‘나’들은 다소 무료하거나 가끔 막막할 뿐, 누구하나 숨을 가쁘게 몰아쉬거나 절망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서 길을 잃은 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하나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오늘날 과거가 전대미문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맞다. 단,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책 308쪽의 표
지금까지 이 글에 등장한 인물들의 출생 시점을 1988년을 기준으로 나눠 본 것이다. 정말이지 과거가 너무 많다! 정리를 한답시고 상자에 아무렇게나 쓸어 넣는다고 해도 일일이 확인할 길 없는 시게루의 게임팩처럼… 아직 등장하지 않은 『레트로 마니아』의 다른 등장인물들을 포함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른편에 꼬맹이 여학생, 미규, 우희, 브루노, 신춘문예 상금으로 손목시계를 산 후배, 새까만 장우산을 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자, 그리고 기껏해야 두어 명이 더 들어간다면, 왼편에는 어림잡아 그 서너 배는 되는 인원이 들어갈 것이다.
1988년 이전에 태어난 이들이 모두 레트로 마니아라거나 1988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누구도 레트로 마니아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후자에게 미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따라서 미래가 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과 세계(가 되어 버린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이 같을 수 없다는 거다. 레트로 마니아들에게 과거가 사라진 미래의 대용품으로, 욕망을 투영할 대상으로 재발견된 것이라면, 미래 없음이 디폴트로 장착된 이들에게 과거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 따름이다. 오래된 나무처럼. 또는 바위처럼. 이들 사이에 있는 건 단절이 아니다. 시차(視差, parallax)다. G. K. 체스터턴 식으로 말하자면, ‘나’들은 레트로 마니아들이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을 사랑할 수는 있으며 사랑하기도 한다…. 그들은 과거와 소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를 보고, 다시 과거를 바라보는 레트로 마니아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거리를 둔 애정을 담은 시선으로.

4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 「어제와의 이별」(1966)은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김쿠만이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통해 하는 일이다. 과거와의 단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지나치게 많은 과거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상대적인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 혹은–이렇게 말해도 좋다면–중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척하는 것에 더 가깝다. 어린 시절의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볼 수 있던, 도망가느라 너무 바빠 자기가 지금 절벽과 절벽 사이의 허공을 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것을 건너 버리는 주인공처럼.
나는 그것이 포스트-로망 시대에 소설을 쓰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문예창작학을 6년 동안 전공한 김쿠만의 ‘나’들이 정작 소설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특히 그들은 자신이 썼거나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인 소설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레트로 마니아」에 지나가듯 나오는 “야심차게 썼던 단편소설은 심사평에 언급조차 안 됐고”라는 구절이 유일하다. 말하자면 김쿠만은 너무 많은 과거의 문학에, 거대한 역사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짐짓 모르는 체 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쓴다는 것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몰래 쓰고 있거나.
그러니 그것을 레드애플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김쿠만이 쿠엔틴 타란티노의 세계에서 슬쩍해서 자신의 세계에 꽂아넣은 담배의 이름을 따라서. 때론 빨간 사과를 먹기 위해서는 그 안의 초록 벌레를 모른 척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요즘 같은 시대엔 더더욱.